철창에 갇혀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모른 채 화면 바깥의 우리를 바라보는 무구한 눈빛들. 영화 속 몸에 번호가 새겨진 실험 동물들이 받는 처참한 대우는 사실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혹은 그저 쾌락을 위해 동원된 존재들은 이미 현실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혹은 더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우주복을 입은 강아지 코스모는 미국과 소련이 우주 개발 초기에 원숭이, 개와 같은 동물을 우주로 보냈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이 인간 ‘대신’ 위험을 먼저 맛보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죠. 어차피 사용할 거라면 윤리적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들에게 주어질 결말이 똑같다면 굳이 인도적인 방식이 필요할까요?
생명을 물건으로 여기는 생각은 작은 계기만으로 충분히 크고 악해질 수 있습니다. 기준이란 늘 모호해서 나보다 약하고 작은 존재를 해쳐도 된다는 생각은 특권의식으로 이어지고, 그 대상은 나보다 약한 타인으로 범위가 커질 수 있으니까요. 고통을 안 느낀다고 알려진, 덜 느낀다고 알려진, 지능이 낮은. 이렇게 그 대상을 조금씩 양보하고 죄책감을 무디게 만든다면 작은 고양이를 해치는 일이 약한 여성이나 아이, 노인을 해치는 일로 이어지기는 쉽겠죠.
태도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어떤 대상을 차별해도 된다는 아이디어는 점점 더 많은 차별을 허락합니다. 예를 들어 노키즈존의 존재가 당연해진다면 특정 타인을 배제하고 거부하는 것 또한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게 되겠죠.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에요.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 또한 커질 수 있습니다. 인류가 흑인과 여성, 아이 등 여러 소수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역사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