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에 길고양이들 좀 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요. 발톱으로 차에 기스낸 거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대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살고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모인 오픈카톡방의 운영진 한 명이 무심코 올린 한 마디에 자동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지하주차장에 몇 마리의 고양이들이 자리 잡고 지낸다는 이야기는 익히 전해 들은 상태였다. 이따금 아파트 화단에서 쉬고있는 고양이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껌뻑껌뻑 눈 키스를 해주었기에, 온라인 공간에서나 본 ‘길고양이 혐오’나 ‘캣맘혐오’ 같은 이슈가 내가 있는 주거공간과는 꽤 거리가 먼 이야기라 생각했기에, 아파트 단톡방에서 마주친 무신경한 한마디에 화가 치밀었다.
익명의 주민 100여 명이 모여 있는 꽤 큰 단톡방이었다. 입주자 대표처럼 선출된 권력도 아닌 비공식적인 카톡방이지만, 방장이라는 사람은 관리사무소장과 실제 소통하며 900세대가 넘는 아파트 생활환경에 꽤 입김을 행사하기도 했다. 집값 담합을 도모하는 어둠의 대화방은 아니었지만, 입주민들은 과일을 공동구매하거나 공동주택에 거주하며 겪는 불편함을 서로 얘기하고 해결하는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모인 공동체였다.
고양이에 대한 언급은 운영진 중 한 명이 꺼냈다. 아무리 비공식적인 대화방이라고 하나, 자신의 말이 가질 수 있는 권위나 무게감 같은 것을 생각지도 않고 약한 생명체에 비난을 쏟아내는 무신경한 말에 화가 났다. ‘한 마디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222” “333” 같은 무책임한 동조 대화가 이어졌다. 비난의 불씨는 캣맘(캣챠에서는 캣맘 대신 '레인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필자가 겪은 실제 상황 묘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캣맘' 표현을 유지합니다.)에게로 번졌다. “캣맘들 그렇게 무책임하게 밥만 주고 할 거면 고양이들 죄다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키웠음 좋겠네요.”
귀차니즘 충만한 집사와 사는 탓에, 우리집의 두 고양이는 늘 발톱이 날카로운 흉기처럼 예리하지만 가구는커녕 나의 피부에도 흠집 한 번 낸 적이 없다. 이 작은 생명체가 얼마나 대단한 스크래치를 내나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아예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나, 모니터에 코를 파묻으며 들여다 보았으나 휴대폰 조명을 비춰봐야 겨우 보일 법한 세밀한 흔적들이었다. 꼭 고양이가 아니더라도 자동차라는 소모품을 소유한 이상 언젠가 한 번은 감당해야 할 법한 사소한 흠집 말이다. 스크래치를 호소하는 입주민들과 같은 공간에 매일 차를 두지만, 그 같은 일이 일어난 적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러려니' 싶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커다란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그 흠집으로 인해 차량 도장이 벗겨져 녹이 슬거나 하는 큰 재산적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닌데... 결국 비난의 대상이 약하고 만만한 고양이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한 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이 아파트가 위치한 주소는 인간인 우리한테나 등기를 친 사유지이지, 고양이들에게는 그저 자기네들이 오래 살았던 땅에 불과합니다. 차량 역시 우리한테나 재산이지, 여기 원래부터 살던 아이들에게는 어느 날 사는 공간에 뚝 떨어진 물건같은 것이겠지요. 너무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시는 듯합니다.”
아뿔싸. 깜빡했다. 똑부러지는 말투는 익명 대화방에서 오히려 ‘재수 없음’ 혹은 ‘잘난 척’의 누명을 뒤집어쓰기 쉽다는 것을. 게다가 ‘길고양이 혐오’ 이슈와 관련해서는, 어차피 그들은 약한 존재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합리적인 토론 같은 것이 그다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도.
“솔직히 귀여우니까 그냥 대책 없이 밥 주는 거면서 말이 많네요.”
“그렇게 따지면 이 땅에는 반달곰도 삽니다. 반달곰한테도 밥 주고 필요하면 데려가서 키우시죠.”
“전 재산 다 모아서 차를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산 재산에 흠집이 생기는데 당연히 화가 나는 것 아닌가요?”
“그냥 고양이들 싹 쓸어 죽이거나 캣맘들은 신고해서 다시는 밥 못 주게 했으면 좋겠네요.”
말 꼬리 잡는 발언이 하나씩 쌓일수록 반지성이나 무논리, 혹은 분노와 혐오 같은 것들이 난무했고 나는 더 이상 익명 대화방에서 이뤄지는 이 비생산적인 논쟁에 참여할 의욕이 생기지 않아, 마지막 발언을 올린 뒤에 대화방에서 나와버렸다. 어차피 대화방에 들어 있지 않아도 아파트에 대한 재산권이나 소유권을 침해 당할 일은 없으니, 괜히 스트레스 받으면서 공해 같은 의견들을 감당할 필요가 없지 싶었다. 평소에도 아파트 시설을 이용하는 이웃의 임대주택 주민들에 대한 빈곤 혐오나 노인 혐오, 혹은 장애 혐오 등으로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에 결정은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동시에 ‘혼자 사는 30대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한계도 절감했다. 명함을 주고받는 곳에서나 ‘주요 일간지 기자’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당당하게 논쟁도, 토론도 할 수 있지 이 같은 익명방에서는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익명방이긴 했지만, 괜히 우리 집 동호수가 알려질까 하는 괜한 걱정도 들었다. 혹여 이 논쟁이 관리사무소 같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어진다면 나는 얼굴과 사는 곳 등을 모두 드러내며 의견을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졌다.